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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
오남렬
1938년 출생
1959년 KBS 아나운서
1964년 MBC 아나운서
MBC 아나운서 1부장
MBC 보도위원
먼 과거 내 젊음의 초상이 나를 바라보고 묻는다.
-무엇이 네 마음을 가득 채우고 기쁨을 안겨주었는지 아느냐?“
아나운서 생활이지요.”
-그렇게 좋았나? 아나운서로 시작해 아나운서로 끝난 삶, 후회는 없나?
“네 없습니다.”
-그럼 네 생을 다시 한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아니 그건 더 깊이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아하, 그래. 금방 결단하기가 쉽진 않겠지. 그럼 너의 아나운서 삶이 어땠는지 한 번 들어 보자.
아나운서 생활 시작
꿈인가 생시인가. 1959년 10월에 일어난 일이다. 아나운서 시험에 시골 촌놈이 합격했다. 그것도 서울 KBS에! 운명의 여신이 도왔을까? 그때의 심정을 글로 표현할 수 없다. 아무튼 기적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이때 합격한 아나운서는 모두 13명(송한규, 송영규, 김인권, 최규락, 이병열 등 남11, 여 2). 자유당 시절 KBS 지방국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미국과 일본의 시스템을 도입해서 처음 시행한 아나운서 모집이라 전례 없이 많이 뽑았다고 했다. 한 달여의 교육이 끝나고 열린 축하 리셉션에는 공보실장을 비롯해 방송계의 거물들이 대거 참석했다. 서로 정담을 나누고 있을 때 관리국장이 나를 불러 급히 갔더니 공보실장에게 나를 소개하는 게 아닌가. “성적이 제일 우수한 미스터 옵니다.” “아, 그래. 축하해요.” 이 순간은 꿈같은 현실이었다.
축하의 리셉션이 끝나고 발령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 관리국장실에서 전화가 왔다.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잡다한 생각을 하면서 국장실에 들어섰다. 관리국장은 반갑게 맞아주면서 “당신들 말이야 웬 빽 좋은 친구들이 그렇게 많아. 원래 약속대로 하면 미스터 오가 서울에 남아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내 자리가 위험해. 그러니 지방국으로 내려가야겠어(관리국장이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겼음).” 우선 선택권이 나에게 있기에 고향인 광주로 가면 서울 올라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 고향에서 가까운 전주로 가겠다고 했다.
KBS전주방송국 시절
전주시 고사동에 자리한 KBS전주방송국은 서양식 단층 건물로 문화의 전당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아나운서는 남자 2명, 여자 2명인데, 남자 아나운서 한 명은 경력이 오래된 고참 계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어 현업을 하지 않는 상태였다. 기자가 2명 있었고 PD는 없었으며 아나운서가 뉴스, DJ, 군민 노래자랑 사회 등 일인 다역을 하는 상황이었다. 전주에서의 첫 방송은 서울의 정오 뉴스 다음에 하는 로컬 뉴스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아나운서라는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반응이 좋아 힘이 절로 생겼다. 신출내기 아나운서가 겁 없이 많은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는 경기전, 김제 금산사(백제 시대 창건), 정읍의 내장산 단풍 등 전북의 명소를 소개한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렇게 방송에 전력을 다하고 있을 때, 4·19로 자유당 정권이 몰락했고 장면 내각(민주당 정권)은 국민의 뜻을 감당하지 못해 혼란이 극에 달했다. 판문점으로 김일성 만나러 가자는 데모도 연일 이어졌다. 결국 장면 내각은 5·16 혁명으로 무너졌다. 자유당 시절 공보실의 계획은 완전 백지상태가 됐고 나의 서울 가는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희망을 잃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한 줄기 희망의 메시지가 KBS 동보(중앙방송국의 전문을 전 지역국에 송신하는 장치) 연락을 통해 왔다. 뉴스를 3분 정도 녹음해서 보내라는 것이다.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상경하라는 연락이 왔다.
KBS 서울중앙방송국 시절
나는 나무처럼 홀로서기를 하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내 앞에는 길을 꽉 막은 바윗돌이 있었다. 지방에 내려갔던 동기생 몇 명이 이미 남산에 올라와 자리를 잡고 있는 게 아닌가. 당시 KBS에서는 지방국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남산 중앙방송국에 들어온 순서대로 서열이 정해지는 게 오랜 관행이었다는 것을 이때 알았다. 근무는 4인 1조, 4교대. 먼저 올라 온 동기생이 2번 타자가 돼 있었고, 5·16 혁명 후에 입사한 후배들이 3번 타자, 나는 맨 꼴찌인 4번 타자였다. 숙직 때는 조장이 밤 9시 뉴스, 2번이 10시 뉴스, 3번이 11시 뉴스, 그리고 4번은 11시 뉴스 다음에 있는 기상 통보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낮 근무 때는 4번이라는 족쇄에 묶여 뉴스 한 번 못하는 슬픈 피에로의 생활을 3년 가까이 했다(참 나쁜 전통).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느 날 저녁 근무 때 기적이 일어났다. 배당표에 ‘5시 뉴스 吳’. 실수는 아니겠지? 떨린 가슴을 진정시키고 5시 뉴스를 끝냈다. 건방지다는 얘기가 나올까 봐 네임 사인은 넣지 않았다. 다행히 보도계의 반응이 좋았고, 수고했다고 격려해주는 선배도 있었다. 이때부터 4번 타자인 나에게 저녁 5시 뉴스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숙직 때의 뉴스 담당 패턴은 변함이 없었는데, 어느 날 장기범 과장이 아나운서 회의를 소집해 전혀 예상치 못한 폭탄선언을 했다. “오늘부터 오랫동안 시행해온 뉴스 담당 패턴을 없앤다. 조장이 아니더라도 뉴스를 잘하면 밤 9시 뉴스도 할 수 있다.” 오랜 관행이 무너지는 일대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 날 숙직 때 4번 타자인 나에게 조장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하는 밤 9시 뉴스가 배정된 게 아닌가. 장기범 선배의 개혁 드라이브는 이렇게 시작됐다.
MBC에 정착하다
이 무렵 유명 선배들의 MBC 스카웃설이 나돌았다. 그 어른들이 정말 KBS를 떠날까? 실제로 1961년 MBC가 개국하면서 최계환 선배가 제일 먼저 KBS를 떠났고, 1963년에는 전영우 선배가 이규영, 한경희, 김주환, 김인권 등과 함께 DBS(동아방송)로 자리를 옮겼다. 긴 세월 정체되어 있던 KBS 아나운서실에 숨통이 트인 것이다. 그런데 1964년 TBC(동양방송)가 개국하자 최계환 실장이 주요 후배들과 함께 TBC로 가는 바람에 MBC는 아나운서 확보가 시급해졌다. MBC 총무국장이 KBS를 자주 방문하더니 임택근, 최세훈 선배님의 MBC 행이 확정되었고 송영규, 홍종선, 오남렬, 최정연, 임국희도 같이 옮기게 되었다.
1964년 4월 25일은 MBC로 첫 출근 하는 날. 월급을 KBS보다 몇 배(?) 더 받을 수 있고, 방송도 많이 할 수 있게 된 게 매력으로 다가왔지만, 셋방살이(인사동 동일가구 건물) 방송국의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이런 방송국도 있구나. 그렇지만 나는 방송이나 열심히 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처음 맡은 프로그램은 매일 저녁 7시대에 방송되는 <가요 1번지>였다. 노래만 내보내는 게 아니라 재미있는 얘깃거리도 만들어 관심도를 높였다.
유명한 ‘동백 아가씨’얘기다. 히트곡이 되기 전 작곡가 백영호 씨와 가수 이미자 씨가 출연했는데 두 사람 모두 말이 느리고 방송에 익숙하지 않아서 애를 먹은 기억이 난다. 이미자 씨는 이 한 곡으로 인기 가수가 됐다. 이처럼 당시 히트곡 제조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가요 1번지>는 청취율 조사에서 늘 1위를 고수해 가요계에선 화제의 프로그램으로 회자 되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가요계의 검은돈 거래설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PD를 바꾸는 수술을 했는데 그게 惡手악수였다. 청취율이 곤두박질했다. 이때 나도 10여 년간 진행하던 아쉬움을 뒤로한 채 프로그램을 그만두었다.
행사 중계방송은 이승만 대통령의 장례식 중계를 시작으로 전담이 되다시피 했다. 이 대통령의 유해가 이화장에 안치되었을 때 그 실황을 중계방송했다. 중계방송 후 최세훈 실장이 사용한 어휘가 좋았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칭찬이었다. 그 후부터 장면 총리와 강재구 소령의 장례식을 포함해 육영수 여사, 박정희 대통령 서거 때의 특집 방송도 도맡아 했다. 모차르트와 베르디의 레퀴엠 등의 진혼곡이 흐르자 국민들은 눈물을 흘렸다. ‘나라와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한 대통령,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은 청사에 길이 빛나거라’ 추모 특집 방송의 클로징이었다.
*흑백 시절부터 주요 행사 중계를 전담
<정오 뉴스>는 실장이 전담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바쁜 일이 생기면 내 차례가 됐다. 보도국에선 ‘실장이 자주 빠지는데 아예 오 아나운서가 전담하지’라고 하는 큰일 날 소리(?)도 했다. 몇 년 후 최실장이 <정오 뉴스>를 부장인 나에게 넘겨주었다. 이 정오 뉴스는 정년퇴직 전날까지 하는 기록을 남겼다. MBC는 국가 시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 특집 방송을 많이 했다. 녹음 구성이 많았는데 내레이션은 내 몫이었다. 어느 날, 스튜디오로 가는 길에 중견 성우를 만났다. ‘내레이션 그만 하면 안돼요? 우리들 수입에 지장이 많아요. 아나운서는 그거 많이 한다고 봉급 더 받는 거 아니잖아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 소리에 함께 웃은 적도 있었다.
*한국어문상 시상식
에피소드 ①
J 사장이 슬리퍼를 끌고 아나운서실에 들어오면서 하는 말, “야 최가야(최 실장을 그렇게 불렀다), 오늘 새벽 5시 뉴스 누가 했노? 그 친구 안 되겠더라” 이 말 한마디 던지고 나가 버린다. 그 아나운서는 다음 날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난다. ‘그 친구 안 되겠더라’ 이 한마디 때문에 아나운서실을 떠난 후배가 3명쯤 된다.(지금처럼 카톡이 있었으면?)
에피소드 ②
가수 김용만 씨가 신곡을 냈다. 곡목은 ‘회전의자’. <가요 1번지>에서 자주 방송돼 인기곡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을 때 J 사장이 하는 말. “‘회전의자’, 뭐 하러 자주 내보내나?” 이 한마디로 그 곡은 <가요 1번지>에서 하차. 음악도 잘 모르는 J 사장이 왜 이 노래를 싫어했을까?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그만이지. 이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라고 주변에서 한마디씩 한다.
취미 생활 ①
인류의 공통 언어, 음악. 오랜 세월 외면하고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클래식 소품을 듣게 됐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바다르제프스카의 ‘소녀의 기도’ 등의 소품을 LP로 갖고 싶은 생각이 들어 명동에 있는 레코드 가게에 들렸는데 거기서 ‘이 한 장의 명반’ 저자 안동림 교수와 중대 음대의 김동완 교수를 만나게 됐고, 이분들의 해박한 지식에 감동했다. 이때부터 명반 사는 재미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또한 오디오 애호가들을 만나면서 오디오 재생 시스템의 중요성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아는 것이 病이라 했는가? 램프, 스피커, 턴테이블을 바꾸기 시작했다. 명기라는 말에 현혹됐고 오디오商의 유혹에도 넘어가 바꿈질은 절제되지 않았다. 체력과 청력이 떨어지면 이 병은 자연 치유되는지 요새 나의 오디오 시스템은 다시 초보 수준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소장한 LP 명반은 1,000장 정도, 유명한 연주자들의 CD는 500 여장 정도이다. 이 음반을 골라 들으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디오 해설과 평론가로 활동하던 시절
취미 생활 ②
서울에 蘭난 가게가 처음 생겼을 때 호기심에 들렀다가 그 향에 매료돼 키워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처음 산 난은 중국 春蘭춘란 大富貴대부귀. 향도 좋지만 복스러운 자태가 마음에 들었다. 춘란 한 盆분으로 시작된 난이 3년쯤 되자 200여 분으로 늘었다(단독 주택이라 가능). 그 후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100여 분으로 줄였고, 지금은 체력이 떨어져 30여 분에 정성을 쏟고 있다. 그중에 자랑할만한 것은 제주 寒蘭 楓炎풍염이다. 꽃은 짙은 자색에 화형은 단정한 3각으로 벌어진다. 난향천리蘭香千里라고 하지만 향은 말아 보지 않고 평가하지 마라. 모든 난이 다 향기를 뿜는 것은 아니다. 춘란은 중국 춘란만 향이 있고 일본 춘란과 한국 춘란은 향이 없다. 모 스님이 어느 수필에서, ‘야산을 지날 때 춘란이 지천에 널려 있고 향이 진동했다’라고 썼는데 그 향기는 환상이었을 것이다.
춘란 꽃이 질 무렵이면 夏蘭 꽃이 핀다. 하란 중에서 雪月花설월화와 鳳봉의 향은 세계 최고의 향수도 따를 수 없다. 아쉬운 것은 피어 있는 기간이 1주일 정도로 너무 짧다. 가을이 되면 한란 꽃이 피는데 난 꽃 중에 단연 백미다. 향도 좋고 그 자태가 한마디로 예술 작품이다. 중국 보세란은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많이 팔리는데 기르는 방법을 몰라 대부분 죽는다. 완전히 죽는 데 3년 정도 걸린다. 춘란의 꽃 봉오리가 벌써 봄을 기다리며 미소짓고 있다. 제주 한란 楓炎과 일본 한란 極樂鳥극락조는 개화한 지 한 달이 지났으니 꽃대를 잘라야겠다.
글을 맺으며
먼 과거 내 젊음의 초상이 나를 바라보고 다시 묻는다.
-요즘 아나운서클럽 카톡방을 보면 선후배가 서로 칭찬해주고 사랑이 넘치는데 참 좋은 현상 아니냐?
“백번 옳은 말씀입니다. 카톡에 열심인 후배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계진 클럽 회장이 카톡방장 역할을 참 잘하고 있는 덕입니다.”
-그래 끝으로 한마디 남기겠다. 인생 그렇게 길지 않다. 어스름 해 질 무렵이 곧 다가온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대선배들도 그렇게 떠나지 않았느냐? 남은 생, 선배나 후배들을 아낌없이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거라
“만고의 진리,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