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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
“선후배, 동료들이 보고 싶다”
정경래
KBS아나운서
KBS제주총국 편성제작국장
KBS충주방송국장
2024년 2월 어느 날
제주가 온통 하얗다. 며칠째 눈이 내리고 있다. 내가 사는 ‘조천읍 선흘리’는 제주에서도 눈이 많이 오는 곳이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제주에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줄 몰랐다. 우리 집 뒷마당에는 가끔 노루들이 먹을 것을 찾아 내려오곤 한다. 오늘도 노루 부부가 내려왔는데 발목까지 눈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곁에 숨어있던 장끼·까투리가 놀라 푸드덕 날아간다. 그 소리에 놀라 오히려 내가 넘어질 뻔했다.
제주에 눈이 내리면 온갖 새들의 삶의 소리와 바람 소리가 화음을 이루며 동화 같은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그러나 보이는 아름다움과 함께 불편한 것도 많다. 눈을 치워야 할 일도 그렇고, 제주 공항에는 만여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발이 묶여 있는 일이 종종 생긴다.
그러나 이제 눈이 걷히고 나면 ‘복수초’, ‘수선화’, ‘송엽국’, ‘백서향’ 같은 예쁜 꽃들이 제주의 봄을 안겨줄 것이다. 이런 제주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때는 나도 모르게 사람이 그리워진다. 그리운 사람들과 같이 느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하기 때문이다. 특히 함께 방송하며 같이 지냈던 선배·동료·후배들이 보고 싶다.
아나운서 시절
내가 아나운서로 방송에 첫발을 내디딘지도 어느덧 60년이 다 돼 온다. 1965년 3월 KBS 공채로 들어와 ‘남산 스카이라운지’에서 간단한(?) 연수를 받고 임지인 ‘춘천’으로 떠난 때가 그해 6월이었다. 인사제도가 정착돼 있지 않던 때라 신입사원들이 동시에 발령이 나지 않았다. 나는 다행히 첫 번째 순번 그룹으로 발령받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방원혁 감사가 ‘대전’으로, 최평웅 아나운서가 ‘청주’로 갔다.
춘천방송국은 옥천동에 있는 아담한 청사였는데, 그곳에서 신참 아나운서로 겁도 없이 방송했다. 물론 실수도 많이 했지만, 열심히 방송했다. 당시 동료 아나운서로는 춘천 토박이 이은경 선배가 있었고, 후에 이철규, 강영희 아나운서가 합류했다. PD로는 이장춘, 김영우 선배가, 보도에는 윤병찬 선배가 생각난다. 장기범 국장님도 모실 수 있었다. 그때의 일이 생각나면 왜 이렇게 그때 그 사람들이 이렇게 그리운지.... 가슴이 짠해 올 정도로 그립다.
1960년대 옥천동 춘천방송국 청사
1967년 직원 단체 사진, 뒷줄 3번째가 필자
춘천에서 3년간 근무한 후에 드디어 서울 아나운서실에 입성(?)했다. 당시에 강찬선 과장님과 이광재 실장님이 계셨다. 그러나 나는 그때 군대에 다녀오지 않아 늦은 나이로 軍에 입대해야 했다. 그것도 해병대로 입대했다. 다행히(?) KBS 내에 <軍방송>이 있어 해병대 보병훈련까지만 마치고 <군방송>에 와서 계속 방송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 프로그램이 없어졌지만, 그때는 KBS 제1라디오 오후 6시에 <군방송>이 편성돼 있었다. 당시 시작 시그널과 함께 “우리의 국군! 군방송입니다!” 하고 외쳤던 <군방송> 시작 멘트는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는 사람들에게 회자되곤 한다.
<군방송>을 하던 시절 국영 방송 KBS가 ‘한국방송공사 KBS’로 바뀌는 전환기를 맞았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본사 복직이 늦어지면서 초초해 하고 있을 때, ‘KBS제주방송국’으로 발령받아 제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방송이 즐겁던 시절이었다. 1974년 제1회 미스 제주 선발대회 진행을 고려진 선배와 같이 했던 기억이 새롭다.
1974년 제1회 미스 제주 선발대회 진행
제주방송국 시절 동료들(왼쪽 두 번째부터 정승배 PD, 김영림 아나운서, 정옥순 아나운서)
제주에서 컬러 TV 시대를 맞아 방송하던 80년대 초, 서울 본사로 발령받았다. 그런데 아나운서실이 아니고 ‘TV심의실’이었다. 이후에는 ‘라디오 정보센터’와 ‘사회교육방송국’에서 근무하다가 1993년 ‘제주방송총국 편성제작국장’으로 제주에 와서 제작 업무를 했다. 서울로 다시 올라간 후에는 ‘라디오 정보센터’ 방송위원과 편집위원을 거쳐 ‘충주방송국장’을 역임하고 37년간의 방송 생활을 마감했다. 끝내 ‘본사 아나운서실’ 근무를 못 하고 정년 퇴임한 것이 아쉽고 또 아쉽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나운서뿐만 아니라 심의, 제작, 관리자 등 다양한 분야를 경험한 방송인이었기에 보람과 긍지를 느끼고 있다면 억지일까?
아나운서클럽과의 인연
‘한국아나운서클럽’과 인연을 맺은 것은 80년대 후반에 아나운서 모임의 총무 역할을 하던 ‘배덕환’ 선배가 호주로 이민 가면서 그 역할을 이어받은 때이다. 그때 아나운서 모임의 명칭은 ‘아나운서 동우회’였다. ‘강찬선’ 초대 회장님을 모시고 총무로 일했다.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저녁 식사를 같이하며 얘기 나누던 것이 전부였던 시절이다. ‘황우겸’ 선배님이 제2대 회장을 맡으면서 조직의 틀을 잡아갔다. 워낙 발이 넓으신 분이라 행사할 때마다 여러 기관에서 기념품과 선물(?)을 제공 받는 등 모임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하셨다.
그러다가 다시 ‘제주방송총국 편성제작국장’으로 가게 돼 그때부터 후배이자 친구인 ‘김규홍’ 아나운서가 이어받았다. 김규홍 국장은 워낙 부지런한 성격이라 총무로서의 역할 이상을 해냈다. 그 덕(?)으로 총무에서 사무국장으로, 다시 사무총장으로 승진(?)해 봉사했고, 지금은 부회장을 거쳐 운영위원장으로 봉사하고 있다고 들었다.
2005년으로 기억된다. 제5대 ‘최만린’ 회장님과 ‘김동건’ 수석 부회장님이 ‘한국아나운서클럽’을 사단법인으로 등록하고 ‘한국아나운서클럽’을 각 방송국의 현역 아나운서까지 참여하는 큰 조직으로 발전시켰다. 거기에는 예쁘고 똑부러진 여전사(?) ‘박민정’ 아나운서의 헌신적인 봉사와 숨은 공로가 컸다. 후에 ‘임국희’ ‘차인태’ ‘박찬숙’ 회장님이 클럽 발전을 위해 큰 역할을 하셨고, ‘이계진’ 회장님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향기로운(?) 모임이 되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그사이 ‘박민정’ 사무총장이 장기 집권(?)을 끝내고 ‘채영신’ 사무총장을 거쳐 ‘유영미’아나운서가 사무총장으로 봉사하면서 클럽이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흐뭇한 소식도 들었다. 참 고마운 분들이다.
2011년 클럽회보 초대 편집위원들과 함께
고 장기범 실장님 추모식을 마치고
클럽 출범 20주년인 2011년에 창간된 <한국아나운서클럽회보>는 회원의 소통과 선후배간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온 우리 클럽의 자랑스런 자산이다. 그러기에 내가 초대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큰 보람이었고 영광이었다. 이 회보 발간에는 누가 뭐래도 ‘황인우’편집위원의 역할이 컸다. 정말 아나운서클럽 보배 중의 보배였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변하면서 ‘한국아나운서클럽’이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새로운 발상으로 클럽을 이끌고 있는 이계진 회장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집행진의 열심과 노력으로 우리 클럽이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다.
한 때 팬션을 운영하던 제주 자택
손주들과 함께 느끼는 소소한 행복감
제주에 와서 조그맣게 집을 짓고 산지도 어느새 10 년이 지나가고 있다. 제주의 풍광과 멋 속에 살면서도 늘 가슴 한쪽이 휑하니 뚫린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친구들이.. 그리고 선배 동료들이 그리워서이다. 보고 싶다. 술 한잔 나누며 수다(?)도 떨고 싶다. 눈이 그치면 서울행 비행기부터 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