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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대전방송국 청사 앞에서 양승현 아나운서와 함께
서울 인사동에서 50년 만에 만난 양승현 아나운서
사진 한마디
김주혜(전 KBS)
참으로 풋풋한 시절이었다. 방송이란 직종에 입문해 외곬으로 정신없이 보낸 그 시간들!!
화려한 청춘과 함께 직업에 정진코자 노력하며 자양분을 열심히 퍼 올리던 아나운서 생활이 꿈처럼 펼쳐졌다가 신기루같이 사라진 느낌이다.
60년대 당시 KBS는 방송직 아나운서를 공무원 채용 고시(음성 테스트, 1·2차 논문작성, 방송원고 읽기, 면접 등 ....)로 선발했다. 경향 각지에서 모여든 많은 시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합격이라는 영광의 문을 통해 선발된 감격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1963년에 입사해 소정의 교육 기간을 마치고 국가공무원 ‘방송직 5급을’로 발령받았다. 중앙은 언감생심, 대도시의 총국도 아니고 갑지국, 을지국이라 하여 작은 지역 방송국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남원방송국으로 갔고 아나운서라는 직종에 매료돼 혼신을 다해 방송업무에 매진했다. 아나운서로서의 우월감과 함께.
초임지를 거쳐, 대전방송국으로 전보발령(1966년)을 받고 불만 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근무에 임하고 있을 때, 사진 속의 ‘양승현’ 아나운서가 목포를 거쳐 대전방송국에 발령을 받아오니 기쁘게 환영하고 같이 근무하게 된다. 그야말로 미남 중의 미남이랄까. 모두가 찬사를 아끼지 않는 양승현 아나운서였다.
당시 대전방송국의 정식 방송직 아나운서는 나와 양승현 아나운서 두 사람이고, 임시직이라 하여 안ㅇㅇ, 박ㅇㅇ 아나운서와 성우들이 몇 개의 프로그램을 하곤 했다. 방송과장으로 4급 을의 조창동씨가 아나운서로 뉴스를 진행하며, 보도부, 서무행정도 관장했다. 기술직, 행정직에도 대부분 직원이 정식 공무원 신분이 아닌 소위 B T/O 신분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불만 같은 건 없이 만족하는 듯 맡은바 업무수행을 열심히들 했다.
KBS대전방송국 시절 스튜디오에서
근무 형태를 돌아보니 격세지감이 든다. 나도 사흘에 한 번 숙직 근무를 하고 현업이라는 걸 하게 되는데, 숙직실을 이용할 여건이 안 되니 방송국 가까이 숙소를 정해놓고 새벽에 출근, 5시 방송 개시 멘트와 밤 12시 종료 멘트를 육성으로 생방송 했다. 양승현 아나운서가 중요 뉴스를 담당하면서 지역 <장학 퀴즈>, 지방 순회 <노래자랑> 등으로 인기를 높였고, 나도 현업근무는 물론, <로컬 뉴스>를 진행하고, <정오 뉴스>가 끝난 후 희망 음악 엽서를 받아 소개하는 <노래의 꽃다발>, 어린이 공개방송 <누가 누가 잘하나>, <무엇일까요?>도 부지런히 진행했다.
잊혀지지 않는 <이 주일의 히트송>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토요일 저녁에 전국 네트워크를 연결해, 각 지방국에서 청취자들이 즐겨하고 인기 있는 곡을 신청하면 사연 소개와 함께 신청곡을 틀어 주는 포맷이었는데 인기도가 무척 높았다. 요즘의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만치 열기가 높았다. TV가 없던 시절 라디오 청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프로그램이었다.
서울 MBC 본사로 옮겨간 양승현 아나운서의 후일담이다. “그곳 아나운서실에 가니 선배들이 거의 KBS에서 간 분들이었다”라고 했다. 임택근 상무, 강영숙, 최세훈, 오남렬 선배 등 기라성같은 선배들이 포진해 있었다는 것이다. KBS라는 큰 집에서 기량과 경륜을 쌓은 후 민방이라는 조직에서 자리매김을 한 셈이다. KBS는 마치 인력배치와 인재의 공급처 같다는 표현도 했다. 그 후 50년 만에 양승현 아나운서를 만났다. 서울 인사동에서 김규홍 아나운서와 함께.
1968년에 나도 서울 중앙방송국 아나운서실로 전보 발령되고 정신없이 바쁘게 방송 생활을 하다 1997년 정년퇴직했다. 자신감과 열정을 바탕으로, 지식과 경륜을 축적하며 성장했던 35년 간의 아나운서 생활이었다. 긍지와 보람의 세월이기도 했다.
정년퇴직 후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정신적인 성장을 멈추면 삶이 고착화되는 현상이 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에, 잠재된 능력과 가능성을 끊임없이 살려 나가고자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성장이 계속되고, 그것이 멋진 ‘성숙’으로 이어지는 것이리라. 성숙한 어른이 되길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