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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우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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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의 理想과 現實(2)

李圭恒

 

(전) KBS아나운서실장

2대 KBS 한국어 연구회장

𤯦初는 내가 지은 雅號이다. 어느 家庭이나 家風이 있고 나라마다 文化가 있듯이 雅號는 個人 文化이다. 처음에 嫩草라고 지은 후 白牙金彰顯 선생에게 말씀드렸더니 嫩草生香館이라는 堂號를 내려 주셨다. 白牙 선생은 秋史 이래 최고 명필의 양대 산맥인 一中 金忠顯 선생의 아우요, 如初 金膺顯 선생의 仲氏이시다. 후에 옥편을 뒤지다 우연히 生部 7획에 嫩의 俗字인 𤯦을 발견했는데, 그때의 喜悅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새봄 나뭇가지에 연초록 새싹이 처음(初) 생기다(生)/눈트다’라는 속자가 마음을 끌었다. 𤯦初를 破字하면 ‘初(처음마음처럼)+生(산다)+初(처음 마음처럼)’인데, 거꾸로 읽어도 오묘하게 뜻이 같다. 自作 아호를 가진 후 동료와 후배 아나운서, 그리고 知人들에게 法度없이 지어준 雅號가 100여 개는 될 듯하다. 아호에 관심을 갖다 보니 秋史의 아호는 세상에 알려진 200여 개가 아닌 343개이며, ‘上下三千年 縱橫十萬里之室’이라는 뜻밖의 아호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雅號는 이 땅에 思想의 새벽을 열어준 元曉이다.

1950년 나는 당시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도중 6.25 전쟁을 겪게 되었다. 종로 4가에 본가가 있었는데, 9.28 서울 수복 직전까지 약 3개월 동안 그 집에서 살지 않게 되었다. 이 무렵은 서울에 集中되어 있는 시민을 지방으로 分散시키는 이른바 疏開 정책이 시행되었고, 특히 二代 獨子였던 나는 서울을 벗어나 先鄕인 楊平과 고모님댁이 있던 경기도 利川과 능곡을 오가며 길 위에서 지냈다. 양평과 능곡은 평지였으나 利川은 은고개, 작은 雙嶺, 큰 雙嶺 고개, 넋고개 등 네 고개를 伏中에 걸어야 했다. 서울 외곽을 벗어날 즈음 공습 경보가 울려 시내를 바라보면 제트機가 45도로 내리꽂히면서 폭격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利川 고모님댁은 읍내에서 십리 떨어진 노가지골이었는데 마을근처 우거진 숲에 인민군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미 공군 전투기가 기관총 습격을 하기도 했다. 이때 나와 내 또래의 아이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彈皮를 논두렁과 밭에서 주워다 부엌의 아궁이의 재로 光을 내며 놀았는데, 동네 어른들은 야단 대신 웃기만 했다. 내 친구들이 거의 斷酒한 상태임에도 내가 지금도 막걸리를 즐길 수 있는 體力이 있는 것은 오장육부가 형성될 당시 나이 때 徒步 强行軍 덕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미소 지을 때도 있다.

 

나는 당시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신발을 신었는지, 무엇을 먹고 다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떤 날의 밤은 풀밭 언덕이나 빈집에서 자던 생각은 난다. 다만 길가 坐板 장수나 혹은 길가에서 떨어진 원두막에서 사서 먹던 참외의 맛은 생생하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은 한국의 食文化는 세계적인 건강식 문화로 알려진 지중해식 식단보다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오늘날에는 뜻밖에 맛볼 수 없는 두가지의 ‘잃어버린 맛’이 있으니 ‘참외’의 맛과 ‘쇠고기’의 맛이다. 참외의 語源은 ‘甜(달다 첨)+오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세로로 골이있는 노란색 참외 한 가지 뿐이며, 糖度와 香이 옛날 참외에 미치지 못한다. 크기는 대체로 비슷하지만 6가지의 참외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막참외’는 겉이 濁한 綠色이며, 果肉質이 단단하여 씹는 맛이 있었다. ‘청참외’는 참외 가운데 가장 길쭉하며 果肉質이 쫄깃쫄깃하여 ‘울외장아찌/나라즈케’의 재료라는 소문이 났을 정도였다.‘노랑참외와 백참외’는 오늘날의 참외와 비슷한데 세로의 골이 없다. 가장 특이한 종류는 속이 노을빛인 ‘감참외’로 보드라운 食感이 오늘날 高價인 둥근 모양의 ‘멜론’과 비슷하지만 맛이 월등하다. ‘개구리참외’는 유일하게 끝물에 나오는데 겉이 흡사 개구리등처럼 생겼고, 울퉁불퉁하며 食感은 참외 가운데 유일하게 아삭아삭하다.

해방 이후 쇠고기가 귀하여 말고기를 속여 팔기도 했다. 말고기는 색깔이 빨갛다. 日本語의 俗語 가운데 말고기를 ‘사꾸라’라고 하는데 한동안 ‘가짜’라는 뜻으로 쓰일 때가 있었다. 내가 사는 중산층 동네에 쇠고기 맛집이 두 군데나 된다. 특히 20대 젊은이 美食家들은 등심과 안심에는 관심이 없고 ‘제비추리·차돌박이·부채살·토시살·업진살·채끝등심·꽃등심’ 등 부위에 관심이 있으며 최고의 쇠고기 맛을 享有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더구나 근래에는 일본에서 배합 사료로 특수하게 키운 日本産 和牛(와규)가 大勢이며 최근에는 濠洲産 和牛가 선보이고 있다. 나는 이 모든 쇠고기 부위의 맛을 壓倒하는 ‘쇠고기의 風味’를 기억하는 世代의 특이한 사람이다. 나는 주위에서 唯味·唯美主義者로 인정해 주고 있다.

 

필자가 1960년대 초기부터 1976년까지 남산 중턱 KBS에서 근무하던 시절 을지로의 당시 芳山시장 판자촌에 쇠고기 구이 전문 酒店이 있었다. 표현하기 어려운 특이한 쇠고기 맛에 반한 단골집이었다. 나는동료 아나운서들에게 “우리는 미국의 대통령과 재벌들도 맛보지 못하는 쇠고기 맛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당시 농가에서는 貧富에 관계없이 재산 목록 1호가 소였다. 쇠죽을 가마솥에 쑬 때 각 농가의 형편에 따라 多少의 차이는 있었으나 반드시 콩과 콩깍지를 여물에 섞어 주었다. 평소 쇠고기의 肉味와 콩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나의 확신은 뜻밖에 인도 여행 중 일행 가운데 충청도 축협의 고위 간부와 동행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고위간부는 “쇠고기의 眞味는 오로지 콩여물을 먹은 소에서 발견할 수 있죠. 財閥家에서는 어느 집에 송아지가 태어나면 처음부터 콩만 먹여서 키운 후 구입합니다. 收支 打算 때문에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콩을 飼料로 쓸 수가 없습니다. 소는 草食 動物입니다. 그런데 오직 경제적인 受益을 위해 소에게 자연을 거역한 肉食 動物의 飼料를 주어 狂牛病 사태를 겪은 적이 있듯이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먹는 내용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美食家셨던 할아버지께서는 여름에 풀만 먹인 ‘푸소’는 肉味가 없다고 쇠고기를 멀리하셨다. 인도에서 1층을 0층이라고 하는 것은 0이 인도에서 붓다가 발견한 空思想에서 緣由되었다는 평소 나의 생각을 여행 중 확인하면서 기뻤듯이 쇠고기 風味의 진실 또한 이에 못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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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 (사)한국아나운서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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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行人: 이계진

編輯長: 임병룡

編輯委員: 유지현, 윤지영, 노영환, 권혁화, 전찬희, 하지은

제   작: ㈜나셀프 마이온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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