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이미지 제공: Ilya Pavlov

회원 광장

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

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1.jpg

야구중계의 전설, 전우벽 아나운서

전우벽

 

건국대학교 농대 임학과 
ROTC 6기
1970년(CBS입사)
대한언론인회 방송위원장

대담: 윤지영 vs 전우벽
아나운서들은 뉴스 프로그램 진행이 기본이지만 특히 남자 아나운서들은 스포츠 중계방송 한 둘 정도는 꿰차야 제대로 인정(?)을 받는다. 관록도 붙고. 이번 가을호 웹진에서는 7-80년대 고교야구의 전설 중 한 분인 전우벽 아나운서를 만났다.(편집자 注)

당시엔 왜 그렇게 국민이 고교야구에 빠져들었을까요?

 

지난 8월 일본 고시엔 대회 축제의 열기를 보면서 반세기 전 70-80년대 고교야구의 인기와 열기가 떠올랐다. 일본 고시엔 대회에서 한국계 교토국제고가 우승하자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가 되고, 이웃 학교 학생, 학부모들의 열띤 응원으로 국가 축제로까지 승화된 모습이 바로 과거 우리 고교야구의 분위기였다. 특히 팬들을 사로잡았던 고교야구 특유의 매력들, 예컨대 *풋사과처럼 싱그러운 느낌 *기량만의 승부가 아닌 파이팅 *경기마다 변화된 성장을 보며 팬들도 박수치는 즐거움 *애교심과 애향심을 통해 느끼는 소속감 *미래의 재목을 발견하는 기쁨 *선후배 동문들의 만남의 장이자 *지역 축제로서의 대표성까지 띠고 있었던 것이 당시의 열기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서울의 경우 당시 고교야구 입장료 수익이 서울시 전체 체육 시설 매출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전우벽.jpg

방송사에서 보통 1년에 80회 정도 스포츠 중계를 잡는데, 그 중 야구가 5-60회를 차지한다. 인기 종목에다 광고 유치가 쉽고 시청률이 높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상업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딱 들어맞는 게 야구 종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축구 배구 농구 등 다른 구기 종목은 한 경기에 광고가 5~10회를 넘지 못한다. 여기에 비해 야구는 매회 초-말=18번 등 20번 이상의 광고 시간이 나온다. 그러니 방송사로서는 수입 창출에 더없이 좋은 종목이 야구다. 광고주 좋고, 언론사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 ‘고교야구대회’가 확대된 과정을 돌아보면 J사가 1946년부터 청룡기 고교야구를 주최하고, D사가 1947년 황금사자기 대회를, J사가 1967년 대통령배, H사가 1971년부터 봉황대기를 주최하는 등 당시 각 언론사들의 경쟁도 치열했다. 그뿐인가. 지방 대도시 중에 부산이 화랑기, 대구가 대붕기 등 전국 대회를 유치하기도 했으니, 1982년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까지는 단연 고교야구가 인기를 독차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중장년 청취자들이 선배님의 야구 중계방송을 회상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단은 많이 들어서가 아닐까 싶다. 정말 밤낮없이 중계를 많이 했다. 당시는 라디오가 TV 수준의 대접을 받던 시기였던 데다, 6-70년대 당시 제가 근무하던 CBS는 5개 네트워크(서울 부산 대구 광주 이리)을 활용하여 해당 고교 지역 방송을 통해 처음 1회전 경기부터 중계를 해드렸으니, 야구 팬이면 자동으로 제 목소리에 친숙해지셨을 것이다. CBS와 자매지였던 조선일보에서 전국 야구 중계 안내를 박스 기사로 꼭 실어주기도 했다.


좀 더 현장감 넘치면서도 정확한 야구중계를 위해 했던 나름의 노력도 떠오른다. 기록과 분석에 기반한 중계가 되도록 중계기록부를 작성하곤 했었고, 당시에는 반드시 대한야구협회 기록부를 썼는데 매년 2-3권씩 소모할 정도로 현장에서 살았다. 또, 실내 방송과 달리 실황 야구 중계는 경기의 진행에 따른 움직임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청취자들이 제 중계의 특징으로 꼽아주셨던 것이 즉시적인 속도감과 경쾌함, 거침없는 상황 묘사, 양 감독들의 주요 작전과 관전 포인트 체크 등이었는데, 먼저 숲을 얘기하고 다음 나무 얘기로 실황 중계답게 입체적인 감을 느낄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했던 덕분이 아닐까 한다. 또한, 순간순간 ‘청취자들이 지금 무엇을 궁금해 하고 계실까’를 염두에 두고 진행한다.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고맙게 녹음해 준 그날의 중계 실황을 다시 듣고, 시정하며 고치고 다듬었다. 


TV 컬러 방송이 시행된 것이 1981년인데, 저는 먼저근무 하던 CBS에서 10년(1970-1979)간의 야구중계방송 횟수가, 언론 통폐합 후 KBS에서 24년간(1980-2004) 했던 횟수보다 많았다. 통폐합 이후에는 야구 캐스터 인원이 많아지기도 했고, 주요경기 위주로 중계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야구 캐스터: 박종세, 김인권, 이규항, 이장우, 원창호, 김재영, 이세진, 김영소, 유수호, 전우벽, 정도영, 황 량, 윤성원, 손석기 / 강성희)

가장 기억에 남고 인상적인 경기는 무엇입니까?

 

먼저 1975년 봉황기대회 때 하루 4게임 연달아 중계했던 기억이다. 안개도 덜 걷힌 09시부터 저녁 9시까지 12시간을 꼬박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살았다. “괜찮았느냐? 그럴 리가.” 다음날도 두 게임 연속 중계였는데, 중계 도중에 코피가 터진 것이다. 두 번째 경기 4회 초 한창 중계 중에 갑자기 코피가 주르륵 흘러, 휴지로 한쪽을 틀어막고 겨우 중계를 해낸 기억이 아찔하다. 시즌 때는 하루 두세 경기 연속 중계는 보통이었다. 그 즈음 한국 최초의 여성 야구 캐스터 한영호 아나운서가 데뷔해 기록을 중심으로 중계를 도왔다.

 
또 하나 1982년 3월 27일 ‘한국프로야구’ 개막식 중계방송이다. 화려한 선수단 입장과 유창순 국무총리, 서종철 총재 등 국내외 귀빈이 참석해 1시간여 식순 따라 진행된 개막식, 이날이 바로 한국 야구의 지각 변동이 시작된 날이기 때문이다. 2시7분 전두환 대통령의 시구로 막을 올린 프로 야구는, 그동안 수많은 역사를 이룬 실업 야구, 대학 야구, 고교 야구 등 아마추어 야구를 관심 밖으로 그늘지게 만들었다. 프로 6개 팀으로 출발한(지금은 10개 팀)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승승장구하며 관중 1000만 시대를 구가하고 있지만, 대한야구협회(KBA)는 2016년 간판을 내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기억에 남는 선수도 있다. 고교야구 얘기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남우식(176 우완) 투수다. 71년 막 중계방송을 시작할 무렵에 그의 다이나믹한 투구를 처음 본 나는 그가 단연 최고의 투수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고, 그 이후 그렇게 자신 있고 멋있게 볼을 던지는 투수를 보지 못했다. 당시는 스피드 건이 없었지만 150-155Km로 추정되는 빠른 볼을 던졌다.

 
남우식의 신화는 그가 경북고 3학년일 때다. 1971년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쌍룡기(부산 74~화랑기), 문교부장관기(대구) 등 전국대회를 완전 석권하는 6관왕의 전설을 기록했다.
1) 그해 11월 일본 규슈지역에서 양국 고교팀들이 경기를 가졌는데 6전 전승을 거둬 일본을 충격에 빠뜨렸고, 이를 계기로 한일 고교 교환경기가 정기적으로 열리게 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윤석렬대통령도 중학 시절(73) 진성 팬이었다고 한다. 부상 등으로 80년 은퇴해 프로 선수가 되지 않아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기억하고 싶은 선수다. 프로야구 원년 불멸의 22연승 기록을 세운 꺽다리 불사조 박철순 투수를 공군 야구팀 성무시절(77년) 지도해준 선수가 바로 4년 선배였던 남우식 투수였다.

야구중계 데뷔 당시 어느 선배에게 배웠는지, 그 선배에 대한 추억은 어떤 것인가요?

 

저는 묘하게도 아나운서로서의 출발을 아무 연고가 없는 대구에서 하게 되었다. ROTC 6기로 군복무 후 중위로 제대 전역식을 하러 갔을 때 우연히 ‘CBS 대구방송총국에서 남자 아나운서 1명을 공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응시해 합격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34년 아나운서 생활의 출발점이 되었다.

 
CBS 대구방송총국에서 일할 때는 인력이 부족한 지방 민영방송의 특성상 뉴스, 가요, 팝송 등 전천후 만능 아나운서가 되어야 했다. 힘들지만 즐거운 기억도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팝송 방송 진행이 가장 인기였다. 73-74년엔 팝송 팬클럽 운영(1200명), 전국 최초 엽서전시회, 美문화원에서 빌보드지와 AMERICAN TOP40 릴테이프를 공수해 오자마자 최신 곡을 소개하며 인기 대박을 누릴 즈음 중앙방송국에서 야구캐스터가 필요해 서울로 발령받아 오게 되었다. (당시 야구캐스터는 안용민 선배님 한 분 뿐이었다.)

 
야구중계를 이끌어준 분은 이교석 선배님이다. 60년대 KBS대구방송국에서의 일명 ‘만우절 사건’으로 유명해진 분이기도 하다. (4월1일 아침 뉴스 뒤에 “지금부터 선착순 오시는 분께 라디오 1대씩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방송하여 청취자들이 방송국으로 몰려와 혼난 일이다.) 80년 언론 통폐합으로 다시 KBS로 합류해 활동하시다가 진주방송국장을 끝으로 퇴임하신 분인데, 저를 아나운서로 뽑아주셨고, 야구장으로 이끌어 주셨다. 지금은 경남 밀양에 사시는데 90세에도 건강하시다.

민방 CBS에 재직하셨을 때, 방송사 수입의 상당 부분이 야구중계 광고 수입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보너스는 많이 받으셨나요?

 

지방국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스포츠 중계가 광고 수입에 지대한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야구는 한 경기 중에 20회 이상 상업 광고를 배치할 수 있는 좋은 종목이다 보니, 당시 업무국에서는 야구중계 광고 유치에 신이 나 있을 정도였다.

 
스포츠 중계의 열기가 뜨거운 만큼 시민들의 호응도 컸다. 팬들이 야구협회가 아닌 저희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오늘 야구 경기가 있나 없나를 물어올 정도로 친숙했고, 그 열기에 호응하며 저도 신나게 중계했다. 전국 어디든 찾아가 현장 중계로 팬들의 갈증을 풀어드리는 뿌듯함이 있었다. 심지어 초창기 군산상고의 경우 대구 연고팀 경기를 중소 도시인 군산까지 가서 중계를 해드렸다. 당시 군산 경기장은 외야 펜스를 임시 나무판으로 둘러 쳐놓은 상태였던 것이 기억난다. 드디어 1972년 지구별 초청 대회에서, 창단 3년차인 군산상고는 강팀 부산고와 결승에서 4:1로 패색이 짙었으나 9회말 5:4로 극적인 우승을 거둬 ‘역전의 명수’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송상복, 김우근, 김일근, 김준환). 이어 김봉연, 김성한 등을 배출하며 호남 야구 재기의 기수가 되었다. 제가 받은 보너스는........ 팬들 사랑 듬뿍 받은 것이 곧 보너스!

선배님은 茶道, 茶人으로서도 명성이 대단하십니다. 차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80년 언론 통폐합 후 KBS 아나운서실의 풍경이 떠오른다. 전영우 실장님 외 100여 명이 100평 쯤 되는 넓은 방에 출근해 藝泉 최평웅 선배님의 당일배정이 끝나기 무섭게 우루루 커피숍으로 몰려가던 장면이 어제 같다.

 
종로 5가에서 여의도로 와서 茶와 도자기를 만나게 되었다. 次長 직책도 떨어져 불안하고 흔들리던 시절, 자상한 인품의 鶴邨 선배님, 觀峰, 曉泉, 童月 畵伯, 茶友 학원 원장 등이 마침 KBS와 가까운 목동 쪽에 이웃해 살고 있었던 것이 茶인연의 시작. 보름달 뜨는 날이면 모여 식사 겸 茶를 마시게 되었고 (그래서 이름이 완월회(玩月會)다), 지방중계를 가게 되면 그 지역 도예인이나 차밭을 찾아 견문을 넓혀나갔다.


세월이 흘러 2004년 어느덧 정년을 맞이했지만 퇴직하고도 쉬지 못하고 당시 일본에 진출한 이승엽 홈런 타자 경기를 단독 중계하게 되었는데, 성적이 부진해지자 수주 업체가 바뀌어 야구중계를 끝내게 된 시점에 (사)한국차인연합회에서 사무총장 겸 이사로 일해 달라는 제안이 들어와 취미로 시작했던 다도가 새로운 일자리가 된 것이다. 2004년 7월부터 2021년 8월 부회장으로 퇴직하기까지(현재 고문) 17년간 재직하면서 자연스럽게 茶人이 되어버렸고, 연합회가 운영하는 ‘한국 다도 대학원’을 통해 배출된 수많은 차인(茶道正師)들이 지금도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완월회(玩月會)도 역사를 더해 흩어져 살지만 茶가족으로 변함이 없다.

나는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전우벽2.jpg

평소에 어떤 차를 즐겨 드세요?

 

평소 마시는 茶는 녹차를 기본으로 6대 차 류(綠茶, 白茶, 靑茶, 黃茶, 紅茶, 黑茶)를 가리지 않고 마신다. 더 자주 마시는 차를 굳이 꼽자면 청차(烏龍茶 Oolong), 보이차, 말차, 홍차, 백차 순이지만........ 사실은 생기는 대로 마신다.


“茶를 몰랐으면 지금 무슨 樂으로 지낼까” 하셨던 눈초 선배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도 茶生活을 권해드리고 싶다.

요즘 일과 중 보람을 느끼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은 지난해 4월부터 (사)대한언론인회 KJTV 방송위원장으로 유튜브 일을 하고 있다. 국내 유수 언론계 중진들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일종의 재능 봉사로 일을 거들 수 있음에 감사하다.

 
취미는 많고 능력은 부족한데, 2002년 월드컵 무렵 ‘헬리코박터’균으로 인해 위장 2/3를 잘라내는 바람에 체중이 가벼워져 요즘은 가히 날아다니고 있다. 이번 기회에 야구중계에 대한 기억을 나눌 수 있어 감사하다.

 
(참고: 저의 야구 중계 기록부와 자료 녹음 테이프 사진 등은 요청에 의해 ‘KBO야구 역사박물관’에 기증해 두었습니다.)

1) 팀 총32전 29승 3패로 승률 0.906/ 남우식은 19승 1패 182이닝 평균자책점 0.34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