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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티브 시니어 칼럼
유영미
전 SBS 아나운서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노인학)
서울사이버대학교 성악과 재학 중
현 한국아나운서클럽 사무총장
은퇴하고 싶은 여자들
우리의 딸들이 “엄마처럼 살고 싶어”를 노래하는 나날이 과연 올까?
독서 모임을 하는 내 또래 여성들이 있다. 직업이나 학력이나 살림 수준이나 미모를 불문하고, 오직 일주일에 한 권의 책을 읽고 간단한 독후감을 제출한 뒤, 줌(Zoom)으로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한 달에 한 번은 오프라인 모임을 한다.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시구(詩句)처럼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를 그리워하며 그 어느 시절 문학소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모임을 시작할 때는 과연 일주일에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을까? 하며 사양했지만, 어느새 흥미가 붙어 비록 다 안 읽더라도 숙제처럼 페이퍼를 꼬박꼬박 제출하면서 기대하는 모임이 됐다.
처음에는 궁금했다. 월급 받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자기 계발을 하겠다는 여인들의 속내가 무엇인지. 독서 모임의 리더는 융통성은 좀 없는 규칙적인 스타일이라 인간적인 재미는 부족했지만 팀을 이끌어 가는 능력은 탁월했다. 또한 사생활 질문금지라는 까탈스러운 규정이 참 좋았다. 알다시피 여성들은 말이 많다. 그것도 쓸데없는 수다가 본론을 넘을 때 모임은 방향성을 잃어버리니까!
독서 모임의 좋은 점은 책에서 인물을 만나고 그 인물에게 투영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각자의 눈으로 해석한 사색의 시간이 공감을 끌어낼 때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위로하게 된다. 오프라인 모임은 보통 낮에 하는데 이번 달은 상황이 여의찮아 저녁 모임으로 잡으려다 문제가 생겼다. 남편의 저녁을 차려야 해서 나올 수가 없다는 사람, 또 손자를 챙겨줘야 해서 부담스럽다는 사람, 나 역시 연로하신 어머니 케어가 걱정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도대체 이 나이 되도록 왜 그리 자유롭지 못하냐고 연민의 눈으로 분노하며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그토록 성실하게 살아왔으면 이제부터는 “오! 자유여”를 외치며 온 나라 온 세계를 누비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냐며 되물었다.
많은 여성이 은퇴를 원한다. 그 험난한 경쟁사회에서 당당하게 정년으로 퇴임했으면 이젠 청춘 시절에 못다 한 작은 꿈들을 실현할 놀이터 같은 삶이 기다릴 줄 알았다. 회사 다닐 때는 모두에게 이해되는 시간, 즉 직장 타임이 있었다. 누구도 그 시간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유와 독립’을 준다는 정년 타임에 와서 주위 여자들을 보면 그들은 더 바쁘게 표 나지 않는 자기 삶에 매몰돼 있다.
50여 년간 밥을 해도 은퇴가 없는 주부들, 우리 엄마 세대가 그랬고 그 딸들인 우리 세대가 이어간다. 한국의 여성은 84살이 돼서야 겨우 가사 노동에서 어느 정도 해방된다고 하며, 이는 남성이 47살부터 다른 가족 구성원의 노동에 의존하는 것과 큰 차이가 난다.
5년 단위의 통계청 생활시간조사(1999~2019)에 의하면, 여성의 하루 가사 노동 시간은 남성의 3.8배다. 맞벌이 가정 여성은 남성보다 하루 두 시간 이상 가사 노동을 더 한다. 여성이 외벌이일 경우도 가사 노동 시간은 남성보다 훨씬 많다. 가사를 노동의 가치로 환산하면 여성이 남성보다 2.6배 더 기여하고 있다.
정년 후 가사 노동은 여성이 주당 20~25시간인데 반해, 남성은 10~15시간이다. 이는 정년 전 남성의 가사 노동 시간인 2~5시간에 비하면 문제가 심각함을 알려주는 통계다. UN은 지속 가능한 사회의 실현은 가사와 돌봄 노동의 가치 제고에 있다고 강조한다. 양성평등의 시대에 가사 노동에 투자되는 시간이 남성들에게는 하찮은 일이라서 그럴까? 왜 욕심을 안 내는 걸까?
현모양처가 미덕이던 시대, 미혼여성의 직장생활만 인정하던 험난한 사회 분위기에서 우리 어머니들은 자신의 꿈과 재능을 가정에서 꽃 피웠다. 누군가는 가정을 지켜야 하기에 스스로 그 소중하고 귀한 일들을 감당했다. 그것을 보고 자란 우리 세대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어”를 외치며 사회생활을 했다. 그런 우리 세대가 이제 시니어가 되어 간다. 인류의 관습과 문화는 세대에서 세대로 유전된다. 그것도 아주 오래도록. 우리의 딸들이 “엄마처럼 살고 싶어”를 노래하는 나날이 과연 올까?
100세 시대를 사는 여성의 지위와 삶, 여성의 할 일은 누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대가 만들어 가야 한다. 물론 생각이 다르고 생활도 제각각이지만, 노년 여성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다 보면 답이 나온다. 앞으로 평생 남편의 밥을 해결해 준다는 광고를 보고 실버타운에 처음 관심을 두게 됐다는 여고 선배의 말이 우습지만은 않다. 손자를 돌보는 일도, 연로하신 양가 부모님을 케어하는 일도 단지 여자의 일로만 묶어두지 않기를 바란다.
어느새 무거워지는 나이, 시니어 여성들에게도 오롯이 자신의 삶을 즐기는 자유와 독립, 해방이 절실히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