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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의 理想과 現實(4) / 문학의 안과 밖

강남 봉은사 추사의 절필絕筆 판전板殿은 붓글씨가 아니다.

— 추사秋史 단상斷想

李圭恒

 

(전) KBS아나운서실장

KBS 2대 한국어연구회장

저서 『0의 행복』, 『부처님의 밥 맛』, 『재미있는 한국어의 미학』 등

무궁화대상 신인가수상, 대통령상(한글날) 수상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하면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잘 아는 사람도 드물다. 추사에 대한 단편적(斷片的)인 생각을 적어 보았다.


어느 해 정초 대학의 은사이신 운정(云丁) 김춘동(金春東:1906~1982) 선생님 댁에 변인식(영화평론가·국문과 동문)과 세배를 드리러 갔다. 선생님은 순국하셨던 조상을 모셨기 때문에 신학문은 접하지 못하시어 가학(家學)이 학력의 전부였다.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위당 정인보, 육당 최남선 선생과 함께 역사서와 문학서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고려대 초대 총장이자 우리나라 제1호 박사인 현상윤 총장의 스카우트(?)로 고려대에서 평생을 보내셨다. 20세기 신학문에 오염(?)되지 않으셨던 선생님은 어휘와 말씨가 현대인과 많이 달랐다. 한문 시간은 마치 조선시대의 선비를 만나 뵙는 듯해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추사 이래 최고 명필의 양대 거두(巨頭)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과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의 숙부(叔父)이셨다.

 
변(邊)군과 저의 세배를 받으신 후 마땅히 돌아오는 정월에 마시는 차라고 하시면서 당귀차(當歸茶)를 내놓으셨다. 그리고 덕담으로 말문을 여시는 분위기가 천기누설과 보물창고에서 극품(極品)을 보여 주시는 듯 했다. “놀라지 말게. 3일 전의 절필 판전은 붓이 아닌 밥상을 덮는 상보(床褓)로 쓰셨네. 추사가 어린 시절로 돌아간 심경에서 쓰셨다 하여 반진체(反眞体)라고 하네. 여기서 반(反)은 돌아갈 반(返), 진(眞)은 아이 동(童)과 같은 뜻일 세. 그런데 이 말이 어려운지 요즈음 사람들은 동자체(童子体)라고 쓰고 있더군.” 우리는 마치 불가(佛家)에서 ‘한 소식’한다는 경지를 짐작하는 듯 했다. “작고하시기 3일 전 글씨 같지 않게 필력이 있는 것은 붓이 아니라는 반증일세. 봉은사에서 말년을 보내셨는데 기력이 쇠잔하신 추사께 어떻게 하면 글씨를 쓰실 수 있게 할까 중지(衆智)를 모은 결과 필력(筆力)을 기대할 수 있는 밥상 덮는 상보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을까 추론해 보게 되네. 궁(窮)하면 통(通)하는 법이에요. 그리고 추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 서예가에요. 그 이전은 선비들의 달필(達筆)이었지. 한석봉(韓石峰)은 오늘날 사무관급의 문서를 정서(正書)하는 사자관(寫字官)으로 개성 있는 글씨를 쓰지 못하고 천자문 같은 글씨를 썼던 주문(注文)예술가였던 셈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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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은사 판전(板殿) >

나는 아호(雅號)로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겨 말씀을 드렸더니 반진재(反眞齋)라고 내려주시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기력이 쇠하시어 작은 글씨 밖에 못쓰니 조카 되시는 여초 김응현에게 당신의 명이라고 전하라고 하시었다.


여초 선생은 동방연서회에서 나에게 운필법(運筆法)을 가르쳐 주신 은사 이기도 했다. 휘호 받기 어렵기로 소문난 여초(如初)선생께 나는 쉽게 반진 재(反眞齋)라는 당호(堂號)를 모시게 되었다. “오(吾) 숙부(叔父) 운정선생지명야(云丁先生之命也)”는 작품옆의 방제(傍題)이다. 그리고 작호(作號)의 내력(來歷)을 기록한 200여자의 반진재기(反眞齋記)를 운정(云丁)선생의 서당동문(書堂同門)이신  월당(月堂) 홍진표(洪震杓) 선생께서 지어 주셨는데 역시 여초(如初)께서 써 주시면서 이 두 작품은 당신의 대표작이라고 하시었다. 나의 집에 오시는 손님들은 이 집주인은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농담을 한다. 나는 당호에 걸 맞는 아호(雅號)를 지어 보았다. ‘새잎 돋아 날 눈(𤯦)’에 ‘풀 초(草)’ 눈초(𤯦初)라고 지었다. 눈(嫩)의 속자(俗子)인 눈(𤯦)자는 봄날 나뭇가지에 새잎이 처음(初) 생기다(生)라는 ‘눈이 트다’의 ‘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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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호에 걸 맞는 아호(雅號)를 지어 보았다. ‘새잎 돋아 날 눈(嫩)’에 ‘풀 초(草)’ 눈초(嫩草)라고 지었다. 눈(嫩)의 속자(俗子)인 눈(𤯦)자는 봄날 나뭇가지에 새잎이 처음初 생기다生라는 ‘눈이 트다’의 ‘눈’ 이다.

눈초(𤯦初)의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인 ‘눈초 初’의 파자破字인 처음‘초初(처음처럼)+생生(산다)’ ‘초初(처음처럼)’ 거꾸로 읽어도 오묘하게 같은 뜻이 된다. 가정에 가풍이 있고 나라에 문화가 있듯이 아호는 ‘개인문화’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주위의 지인들 100여명에게 "동명(東溟) 관봉(觀峰) 학촌(鶴村) 효천(曉泉) 목리(木里) 고진(古真) 석촌(昔村) 자산(紫山 )예천(藝泉)”이라고 지어보았는데 특히 아나운서들은 직함 대신 아호로 부른다. 이 무렵 인사동에서 서각(書刻)의 명인 오옥진 선생에게서 구입한 소품 (小品)의 판전(板殿)을 안방의 반진재(反眞齋) 맞은편에 걸어놓고 50여 년째 모시고 있다. 판전(板殿)의 필획에 대한 첫 느낌은 기필(起筆:시작하는 붓놀림)과 수필(收筆:마무리 붓놀림)의 획이 붓으로는 낼 수 없는 뭉뚝뭉뚝한 점이다. 먹이 덜 묻은 비백(飛白) 또한 상보(床褓)가 아니면 낼 수 없을 정도로 거칠다. 상보의 재질에는 발이 굵은 삼베(마포麻布)와 가는 경우의 사포(紗布·비단), 그리고 모시와 무 명 등이 있는데 판전의 붓대용의 상보는 삼베일 듯하다. 판전(板殿) 의 목부(木部) 종획(縱劃)의 기필(起筆)은 마치 꽃이 피기 전의 꽃봉오리와 같은 원필 (圓筆)로 붓으로는 힘든 획이다. 획의 굵기에 따라 제일 가는 일분필(一分筆) 과 중간 굵기의 이분필(二分筆) 제일가는 삼분필(三分筆)이 있다. 판전은 이분 필과 삼분필이며 전(殿)의 삐침 획(丿) 끝부분만이 지나치게 날카로운 일 분필이다. 이는 서각(書刻) 과정에서 모필(毛筆)로 썼음을 강조하기 위해 원본과 다른 서각장(書刻匠)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기연불연(基然不然: / 세상에는 그리 할듯한데 그리하지 않은일이 많다. 판전의 방제(傍題) “칠십일과 (七十一果) 병중작(病中作)”을 71세 과천에서 병환 중에 쓰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추사는 55세부터 9년간 제주도 유배생활을 마치신 후 63세에서 71세까지 모두 네 곳에서 지내셨다. 서울의 용산과 함경도 북청(1년) 67세에서 70세까지 과천(果川)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4년 그리고 작고하시던 71세 때 이른 봄 서울의 봉은사로 거쳐를 옮기셨다. 칠십일과(七十一果)는 필자의 견해로는 “말년에 거둔 열매/대표작”이라는 뜻으로 극소수의 작품에만 쓰셨다. 71세 되시던 해 이른 봄날 13세의 천재소년 유생 (儒生) 명교(明橋) 상유현(尙有鉉)이 당돌하면서도 대견스럽게 봉은사로 추사를 찾아뵌 후 기록한 책 추사(秋史) 방현기(訪見記)가 증명하고 있다. 추사가 작고하시기 직전의 행적이다. 약 보름 전에는 현 강남구 내곡동의 헌인릉을 참배, 헌릉은 3대 태종과 왕후, 인릉은 23대 순조와 왕후를 모신 곳이다. 9월 말경 화엄경 판각(板刻)이 완성되며 작고 3일 전인 10월 7일 판전을 쓰셨다. 특히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보름 전의 행차에 이어서 또다시 인릉을 참배하시고 다음날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정확한 장소는 인릉에서 주무셨는지 봉은사로 돌아오셨는지에 달려있다. 참고로 봉은사와 헌인릉의 거리는 오늘날 9km이다. 이와 같은 극적인 두 번의 인릉참배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추사가 45세 때 아버지 김노경(1766~1837)은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3년 후 순조의 은총으로 풀려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친의 해배 다음해에 순조께서 서거하셨다. 죽음을 예감했던 추사는 유생으로서 마지막 예를 갖추었던 것이다. 노쇠한 몸을 이끌고 작고하시기 보름 전과 하루 전날의 비장한 행보에서 인간과 선비 두 면의 추사를 발견하게 된다. 아호의 벽(癖)이 있었던 추사는 343개의 아호와 상하삼천년종횡십만리지실(上下三千年縱橫十萬里之室)이라는 호도 있다.

 
이른바 추사체는 어떻게 탄생되었을까. 필자는 아직까지 흡족한 해답을 못 보았다. 중국의 스승인 완원(阮元)은 서예수련의 이상론인 북비남첩 론(北碑南帖論)을 저술한 후 중국학계에 발표하기 전에 추사에게 보내주었으니 얼마나 감동을 받았을까. 제주도 유배시절 이 저서를 금과옥조로 환골탈태하여 완성시킨 예술의 경지가 동북아 서단에 최초로 등단한 해서(楷書)도 예서(隸書)도아닌 비해비예(非楷非隷)의 추사체이다. 추사 자신은 그 많은 아호 가운데 완원(阮元)선생이 지어주신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즐겨 썼던 연유를 알 수 있다. 추사체는 거목(巨木)을 축경(縮景)한 분재(盆栽)의 웅장한 멋 그리고 괴석(怪石)의 미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단정하고 반듯한 글씨만 보아왔던 당시 세인(世人)들의 안목(眼目)으로 파격적인 추사체는 버르장머리 없는 글씨로 보였을 것이다. 추사는 타인들이 헐뜯는 글씨에 대한 조롱에 이렇게 반응했다. 불괴시무이위서이(不怪示無以爲書耳,耳:뿐) 문외한(門外漢)의 눈에는 추사체가 엄격해 보인다. 그러나 붓을 몇 년 이라도 잡아본 서예인 이라면 추사체는 긴장감에서 벗어나 즐기면서 쓴 글씨임을 느낄 수 있다. 즉 수·파·리(守破離:원칙을 지키되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세움) 경지의 서예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국에서는 서예(書藝) 중국은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하는 연 유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추사가 말년에 쓰셨던 유어삼매(遊於三昧) 유천 희해(遊天戱海)의 필법과 내용 모두 추사체의 철학을 뜻하고 있다. 나에게 논어에서 가장 아끼는 글귀를 뽑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다음의 문장을 든다. “아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즐기는 사람이 잘 사는 인생이다.”知之者不如好之者,好之者不如樂之者 논어는 인생을 의미로 본 것이아니라 재미에 있다고 하였다. 서양의 문화사학자인 요한 호이징어Johann Huizinga는 어린이가 장난에 몰두하며 노는 본능은 원초적 본능이라고 하였다. 장난감 놀이를 하지 않은 어린이는 훗날 성장 하여 폭군 형 인간이 된다고 하였다. 동서양인의 ‘인생은 재미’라는 공감 의 명제(命題)가 반갑다. 이러한 철학은 인간생명의 유한성 극복을 위한 반작용의 명제(Proposition)일 것이다.


추사체에 대한 여담이다. 추사에 관한 저서에는 작품이 실리게 되는 데 나의 안목으로도 단박에 위작(僞作)임을 발견할 때가 있다. 특히 저명인사의 저서일 때는 실망이 크다. 또한 평생 추사체를 연구한 거제도출신 서예가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1868~1943) 선생을 높이 평가하는 글을 볼 때 역시 같은 심경이다.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선생께서는 추사체 (TYPE)대신 추사 서풍(書風,STYLE)이라 하였다. 그림공부를 할 때에도 아그리파와 줄리앙 석고상을 소묘(素描)하며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본받지 않는 이치와 같다. 따라서 서예에 입문하면 무사형(武士型)의 해서체(楷書体)인 안진경체(顔真卿体) 같은 해서체이지만 조각상같은 미남형의 육조체 (六朝体) 미인형의 구양순체(歐陽詢体)를 임서(臨書)한다.

 
추사 선생께 당신의 대표작 한 점을 들어주십사라고 했을 때 아마도 작고하시기 두 달 전인 8월에 쓰셨던 다음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볼 때가 있다.

大烹¹(享+灬)豆腐瓜薑菜 (대팽두부과강채: 제일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로 만든 찌개) 高會夫妻兒女孫 (고회부처아녀손: 제일 흐뭇한 모임은 부부 아들 딸 손자가 모인 자리)
 

추사는 명문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붕당정치의 희생이 되어 제주도에 이어 함경도 북청에서 유배생활을 했으며 이 무렵 부인과 사별의 아픔을 겪었고 벼슬이라고는 충청도 암행어사를 잠시 했을 뿐이다. 이 서체 (書体)야말로 예서체(隸書体: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소장서평)로 추사체의 정화(精華)이다. 아울러 추사는 서간문(書簡文) 외에는 흘림체의 초서(草書)를 남기시지 않았는데 이는 서법(書法)에 철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머리 글귀인 「대팽大烹」에서 우리나라 한자에 없는 팽「烹」이 아닌 팽「享+灬」²을 쓰셨을까. 중국의 국학대사(國學大師) 자전(字典)에는 있으나 상용(常用)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는 평생 단란한 가정의 삶을 누리시지 못 한 한恨의 잠재의식의 표출은 아니었을까. 이제 이승에서 형통(亨通)할 일 이나 소원도 없고 말년에는 불자이셨기에 내세(來世)에서 향유(享有)의 시절을 기원하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필자의 마음으로 간주하고 해석해 본 관심석(觀心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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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원 문에는 삶을 팽(烹)자의 중간에 누릴 향(享)자처럼 아들 자(子) 자가 들어간 팽 자가 제시되어있다.

² 주¹과 같은 한자  

< ​추사秋史 대팽大烹 >

추사의 제주도 유배하면 떠오르는 것이 국보 세한도(歲寒圖)이다. 어느 한 사람 거들떠보지 않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에 계신 스승에게 제자 이상 적(李尙迪)은 3년째 되던 해에 만학집(晩學集) 등 4권 또다시 그 이듬해에 황 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등 120권을 부쳐드렸다. 세한도는 추사가 화답(和答)하는 뜻으로 자신의 심경을 그리고 쓴 작품이다. 歲寒年後 知松栢之後凋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동지섣달이 되면 푸르던 모든 잎 새 들은 떨어지지만 상록수 잎은 변함이 없구나) 유명한 방제(傍題)이다. 나는 평소 에 옛 선비들의 아호가 뜻밖에 평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제자 이상적李尙迪은 역관譯官이었기에 중국을 자유롭게 드나들던 지식인답게 아호 역시 세련된 우선(藕:연뿌리船)이었다. 불자였던 이상적은 차시불(茶是佛:차가 부처니라)이라고 하였다. 이상적은 중국에 멋쟁이 친구로 장요손(張曜孫)이란 선비가 있었다, 어느 해 귀국길에 당나라의 시인 왕발(王勃)의 글귀를 도장에 새겨 주었다.

 
海內存知己 (해내존지기 :이 땅에 지이(知已) 한 사람 있다면) 天涯若比鄰 (천애야비린 :이 세상 어디에 산다하더라도 바로 나의 이웃에 사는 듯 하네 : 해내(海內 :이 땅), 천애(天涯: 하늘 끝), 린(鄰: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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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은 서재 이름을 해린서옥(海鄰書屋)이라 하였다. 오늘날 서울 중구 필동 한국의 집에는 국제적인 우정의 상징인 해린관(海鄰舘)이 있다, 현판 글씨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이 쓰셨다. 나는 추사의 작품 쾌의당(快意堂)(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을 울릉도의 고사목(枯死木) 향나무 판(길이 75cm, 폭 7cm, 두께 4cm)에 서각(書刻)한 작품을 모시고 있다. 말갈기를 휘날리며 우측으로 달리는 무늬형상과 작품이 잘 어울린다.

< ​추사(秋史)쾌의당(快意堂) >

동갑내기였던 초의선사(草衣禪師)는 추사의 평생지기였다. 그리고 제주도 유배시절 이전부터 차를 보내주었다. 추사가 50세에 차와 선(禪)은 같다는 뜻의 「명선(茗禪)」이라는 작품을 보내주었다. 추사의 작품 가운데 가장 크며 간송미술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가로 57.8cm, 세로 115.2cm) 좋은 차는 좋은 친구와 같다는 가명사가인(佳茗似佳人)이라는 글귀가 떠오른다. 작품의 방제(傍題)인 병거사(病居士)는 무슨 뜻일까. 추사가 병환 중에 쓰셨다고 생각하기 쉽다. 병거사는 유마힐(維摩詰)을 가리킨다. 유마거사( 維摩居士)는 재가불자의 우상이었다. 유마경은 붓다께서 10대 제자들에게 유마의 병문안을 권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소위 프로(?)의 10대 제자들이 재가(在家) 불자에게 병문안 가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문수(文殊)보살만 이 병문안 간 자리에서 설법을 듣는 형식의 경전이다. 다음은 어느 고승이 들려주신 유마경 출현의 배경이다. 오늘날보다 훨씬 인구가 적었던 당시 농경사회에서 백성들의 불가의 출가(出家)로 농사지을 일꾼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속세인의 입장에서는 출가(出家)가 아닌 가출(家出)이었던 셈이다. 즉 유마경은 출가방지용 경전으로 대승불교의 입장에서는 속세에서도 얼마든지 성불가능성의 용기를 준 경전이라 하겠다. 석굴암 협시불(俠侍佛)하면 미(美)의 화신(化身)인 미스 신라 같은 십일면(十日面)관음보살 입상과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떠오른다. 그런데 석굴암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은 미완성 상태의 의도적으로 거친 상태의 조각상이다. 이는 재가불자(在家佛子)도 진리를 논할 수 있고 깨칠 수 있다는 은유였을 것이다. 중국 문인화의 시조(始祖)인 왕유(王維)하면 서화인들은 소동파(蘇東坡)가 그의 시화 (詩畫)세계를 극찬한 명구名句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가운데 그림이 있네”(화중유시畵中有詩, 시중유화詩中有畵)가 떠오를 것이다. 이러한 왕유조차도 자신을 왕마힐(王摩詰)이라고 하였다.


추사(秋史)는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명필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금석金石 학자였음을 잊기 쉽다. 서울의 등산객들이 비봉(碑峰)이라고 부르는 서울의 북한산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의 비문(碑文)을 추사께서 판독(判讀)에 성공하여 국사(國史)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셨다.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는 신라 영토 확장 기념사업을 돌에 새긴 조형물이다. 이곳은 해발 560m로 초보 등산객들에게는 힘든 코스이다. 추사는 30대 초반 이곳을 두 번씩이나 가셨으니 체력이 좋았던듯하다. 추사는 학문과 예술을 함께한 학예일치(學藝一致)의 한국 제1호 고고학자였다. 추사체는 제주도 유배시절 한을 승화시킨 결품(結品)으로 파격적인 조형미의 극치이다. 예술가의 평가는 작품에 있다면 추사는 해배(解配) 이후 8년 예술인생이었다. 서양미술의 시각(視角)에서 추사체(秋史体)는 반추상인 셈이다. 동서양의 미술은 추상에서 만난다. 서양의 피카소는 “나는 13살 때 거장(巨匠)처럼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이처럼 그리기 위해서는 평생이 걸렸다.” 아이처럼은 퇴보가 아닌 성숙된 어른의 천진(天眞)이다. 사람과 글씨는 함께 늙어간다(인서구로人書俱老)고 한다. 사람은 늙어 가면 어린이로 돌아가듯이 동자(童子)가 마음의 고향에서 꽃피운 걸작(傑作)이 동 자체(童子体)의 판전(板殿)이다. 큰 기교(技巧)는 어수룩함과 같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 )경지의 판전(板殿)은 추사 예술의 화룡점정(畵龍點睛)으로 또 다른 백미 (白眉)이다. 끝으로 판전(板殿)의 금가루로 칠한 금칠(金漆)에 군소리 한마디. 갈대나 억새가 어울릴 선사시대 유적지에서 코스모스나 장미 양귀비꽃을 보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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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 (사)한국아나운서클럽
소재지: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동로 233(목동, 한국방송회관 15층 3호)

메   일: announcerclub@naver.com

發行人: 이현우

編輯長: 임병룡

編輯委員: 윤지영, 노영환, 권혁화, 전찬희, 하지은

제   작: ㈜나셀프 마이온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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