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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제공: Ilya Pavl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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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 / 정흥숙 아나운서 편

“신이 내린 달란트 한 방울까지 아름답고 충실하게”...

對談 정흥숙 아나운서 ( 교수) : 윤지영 한국아나운서클럽웹진 편집위원

정흥숙 아나운서

 

·전 MBC아나운서
·미시건대연구교수 역임
·중앙대학교 의류학과교수 역임
·한국복식학회회장 역임
·현)한국복식학회상임고문
*저서‘서양복식문화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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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년 아나운서 시절 >

정흥숙 아나운서가 무대에서 시를 읊기 위해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성경에 나오는 달란트 이야기가 떠올랐다. 다섯 달란트를 주인에게 받아 성실히 두 배 이상의 성과를 이룬 사람이 약속한 때에 주인으로부터 더없는 신뢰와 축복을 받아 그 이상의 달란트까지 받는 이야기다. 엉뚱한 상상이지만, 사랑이 가득하신 조물주께서 바라보신다면 신이 주신 재능을 헛되이 하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해 인생을 성실히 살아가고 열매 맺는 딸이라면, 주인 된 신에게는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일까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일까! 신은 그녀에게 정말 많은 재주와 능력을 주셨다! 쉼 없이 달려온 그녀의 경력은 어딘가 그녀의 남다름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아마도 삶에 대한 열정과 자신감이 시너지를 일으킨 아우라와 같은 묘연함이다. 자신의 무대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암송을 즐기고 있는 그녀! 봄 처녀 같은 싱그러운 정흥숙 아나운서를 좀 더 가까이 느껴보려 한다. 

1. 학창 시절에 어떤 아나운서를 동경하셨습니까?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예술을 좋아했지만, 특히 여성으로서  거의 최초로 음악 감상실에서 DJ를 했을 만큼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폭넓게 음악을 이해하고 감동적이고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아나운서를 기대하고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예능이나 여러 교양에 두루 취미나 지식을 갖춘 아나운서를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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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년 세종대 박사학위를 받고 >

2. 아나운서를 꿈꾸셨던 이유가 특별히 있으셨습니까?

 

대학 시험을 보면서 아나운서도 되고 교수도 되고 싶다고 장래 희망을 밝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선생님으로부터 욕심이 참 큰 학생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무엇보다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며 발전해 갈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밥 먹으러간 사이 끝나버린 아나운서 시험

3. 입사 시험을 보면서 있었던 일화가 있었다면 말씀해 주세요.

 

필기시험을 본 후 음성테스트와 인터뷰는 점심을 먹고 다시 한다고 해서 저는 5분 거리에 있는 집에 가, 밥을 먹고 40분 안에 돌아 왔는데, 그 안에 모두 테스트가 끝났고 시험장에 수험생이 아무도 없어서 너무나 황당했어요. 그때 감독관이었던 김창연 아나운서가 저에게 시험지를 주시면서 마이크 앞에서 읽어보라고 기회를 주셔서 저는 놀라고 떨리는 음성으로 문장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정신도 없었고 울상으로 거의 떨어졌다고 단념했었죠. 그런데 한 달 후, 발표에서 안 사실은, 음성테스트에서 제가 성적이 가장 좋았다고 들었어요.  아마 그것은 Metro 음악 감상실과 라 스칼라, 뉴 월드 음악실에서 제가 여성 최초로 디스크자키를 해왔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수험번호가 111번이었는데 첫 번째 합격자로, 제가 대표로 합격 전달식에서 합격증을 받았어요. 당연히 떨어졌겠거니 체념하고 있었던 저에게는 짜릿한 반전의 순간이었습니다.

4. 방송사에 입사해 그 시절 분위기는 어땠나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성화 선배 아나운서와 권정애 선배 아나운서가 각별하게 사랑을 듬뿍 주셔서 즐겁고 늘 화기애애했어요.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는 흐뭇한 순간은 입사 초창기 6시 이후 저녁 식사 때입니다. 중국식당에서 맥주와 식사를 매일 하다시피 했는데 두 여자 선배들의 깔깔대는 특유의 예쁜 웃음소리는 내용이 없어도, 내용을 몰라도 함께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같이 웃게 되는 마력이 있었어요. 꼭 그곳이 천국 같았어요. 낮에 엄하고 까다로웠던 이장우 선배 아나운서의 교육으로 삭막했던 분위기를 말끔하게 씻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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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선·후배 아나운서들과 >

5. 하고 싶었던 방송이 있으셨나요?

 

문화 예술 분야의 방송을 좀 더 많이 하기를 바랐습니다. 예술사에 관련된 현장 탐방이나 미술에 관련해 작가별 탐방이나 회화작품별로 파고 들어가면 많은 것을 더 배울 수 있었을 텐데요. 좀 더 많은 경험을 해보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6. 가장 기억에 남는 방송이 있으십니까?

 

입사하고 방송 교육훈련 한 달 만에 동기생 12명 중에 첫 번째로 지목되어 공군사관학교 생도들 200여 명이 있는 강당에서 공개 방송 멘트를 맡게 되었었는데, 그 당시 얼마나 당황하고 긴장 했었는지, 떨었던 장면이 요즘도 꿈에 가끔 재현이 돼서 종종 나오고 있어요.(웃음^^)

또 다른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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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년 내가 만든 의상을 입고 룸메이트와 美MSU 대학원생 시절 >

7. 유학을 떠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중학교 때부터 태화관이라는 선교사가 세운 특수 영어교육기관에서 영어교육을 받았는데 우수한 학생들만을 선별해 철저하게 영어로만 이야기하고 소규모로 미국인 선생님과 대화하기도 하는 곳이었어요. 이곳에서 유학에 대한 꿈을 꾸게 된 것 같아요.

 
대학교 1학년 때 미국 유학 시험을 보았고 그 때로는 받기 쉽지 않은 여권을 받았습니다.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학비 장학금과 대학원 조교 비를 받게 되어 유학을 보장받았는데 그것도 기쁨이었지만, 너무나 자랑스럽게 또, 꿈에 그리던 방송국 입사시험에도 바로 합격 되었습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그 당시 여권의 기한과 서울대에서 10년 안에 유학을 마치고 교수로 돌아오기로 한 약속 등등, 여러 가지 선택의 기로와 장래에 대해 갈등이 있었어요. 하지만 주어진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저는 짧다면 짧은 4년간의 아나운서 생활을 과감히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8. 의상 복장 사학을 연구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요?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이끌어 주시던 교수님들로부터 복식사를 전공하고 학교로 돌아와 이 과목으로 학생들을 지도할 것을 부탁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공부할 때는 이 분야에 대해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오히려 유학할 때 여러 가지 사실적 자료와 고증된 의복의 형태 슬라이드, 사진들을 보면서 이해가 쉬웠고 흥미와 열정을 품게 되었어요.

9. 미국 생활에서의 경험과 느낀 감정들을 간략히 부탁드립니다.

 

1965년에 영국 비행기 B.O.A.C의 승객 300여 명 중에 한국 사람은 N.Y로 가는 간호사 한 명과 나 둘뿐이었는데 하와이에서 비행기 주유를 위해 잠깐 서는 동안 승객을 쇼핑센터에 내려놓았어요. 그때는 유학생이 가지고 갈 수 있는 달러의 최대가 100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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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총동창회 모임에서... >

전 재산 100불을 가지고 1센트짜리 엽서를 샀는데 Shop 주인이 잔돈을 바꾸러 은행에 가서 빨리 오지 않으니까, 우리 두 명의 승객을 호출하는 방송 안내가 나왔지만,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는 그냥 갈 수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한 보따리의 동전 99불 99전을 겨우 받아 비행기로 달려가니, 이미 비행기는 날아가고 없는 거예요.

허망하게 엉엉 울고 있는 우리 둘을 비행사 직원들이 다가와 등을 토닥거려 주면서 (Poor Baby!)를 연발 ........ 회사 사무실로 안내해서 다음 비행기가 떠날 때까지 7시간 동안 편안히 구경하라고 했지만 두 사람은 꼼짝 않고 사무실 안을 지켰던 기억이 있습니다.

귀국과 후학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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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복식학회 회의를 끝내고, 샌프란시스코 >

10. 교수로서 이루신 업적을 간략하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조형 예술, 건축 조각, 회화, 공예에 나타난 예술 양식이 의상에 미친 영향”이라는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고 이후 이 주제는 복식 미학에 대한 연구로 지금도 활발하게 연구가 후학들로 인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Dr. Eicher의 평대로 미술 양식과 의상 양식을 접목시켜, 비교분석하는 연구는 저의 박사학위 논문이 국제복식연구 발표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인정되어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 대학원과 교수들의 연구 과제로도 많이 다루어졌고 꾸준히 좋은 논문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는데 대해 매우 뿌듯합니다.

귀국 후, 저의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고도 채용이 가능한 곳은 사립학교인 중앙대학교였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로 한 달을 망설였는데, 중앙대학교의 윤서석학장님의 요청으로 중앙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의류학과 학과장과 가정의학과 학과장을 겸임해 발령 받게 됐습니다.

 

20여 평의 넓은 연구실이 수풀 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산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신선함이 행복감을 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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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대학교 교수 퇴임식장에서 >

11. 그밖에 어떤 일들에 몸담아 오셨는지도 소개해주시지요.

 

1974년 귀국하자마자 한국에서 영어강사로 귀재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신동운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분이 영어교재 만드는 회사를 만들어 보자고 하셔서 충무로에 있는 레코드 회사 사무실을 맡아 ‘실용영어회화’ 교재를 만들었어요. 교재가 나오자마자 사무실의 전화가 1초도 쉬지 않고 울렸고, 주문을 받은 지 이틀 만에 매진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2005년 퇴임 후에는 영어회화 수업을 소수로 이어 나가기도 했는데 소리 소문 없이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했습니다.
 

2009년 6월부터는 압구정동 세실아트홀에서 클래식 음악 감상모임인 ‘유리디체’를 만들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선후배, 아나운서 선후배로 한 때 168명까지 기록되다가 코로나 등 주춤하였고 다시 좋은 뜻으로 가끔 모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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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때... >

12. 현재 하고 계신 일들은 어떤 것입니까?

 

무엇보다 건강을 위해서 탁구를 하고 있어요. 10년 전부터 탁구 레슨을 일주일에 두 번 받고 있어요. 가끔은 남편이 상대를 해 주기도 해서 더 즐겁습니다. 

그리고 2015년부터 수요일 하루는 온종일 유화 반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등록금이 면제여서 한 달에 한두 번씩 그림을 그렸었는데, 한국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그림 그리기에 열심히 매진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올해의 예술인상”을 받았었고 시작한 지, 만 10년 3개월 만에는 두 번째 개인전을 인사동에서 갖게 되었어요.

상 받은 것을 자랑한다면 ‘올해의 예술인상’ 수상 4회, ‘갤러리 꽁세유 응모전 신인 작가상’ 수상, ‘대한민국 현대여성 미술대전 특별상’ 수상 5회, ‘인사동 사람들 특별전 기업상’ EOEO상 수상, ‘한국미술 협회 이사장 상’ 수상, ‘국제 현대 예술협회 오늘의 작가 정신상’ 특선과 특별상 수상 5회를 수상했습니다.  
 

요즘에는 1호짜리 작은 그림 <님 찾아 가는 길>을 집에서 틈틈이 그려 고마운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작은 즐거움과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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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년 8월 인사아트프라자 작품전시회 >

함께 하면서

 

3월이 되면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일이 신경 쓰이기도 하지만 기쁨 이예요. <나는 한국의 아나운서였다>라는 글을 정리하면서 봄을 맞는 한창 바쁘고 번잡한 시기이며,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살아나는 푸르른 때라서 모임도 많고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조용히 앉아서 생각을 정리한다거나 글을 쓴다는 게 도저히 불가능한 봄이죠. 하지만 짬을 내서 짧게 나마 아나운서 시절의 행복했던 시절을 돌이켜 볼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한국아나운서클럽에서의 만남과 우연은 항상 반갑고 기쁨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웃음이 됩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전임 이계진 회장님을 비롯해 모두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다들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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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 (사)한국아나운서클럽
소재지: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동로 233(목동, 한국방송회관 15층 3호)

메   일: announcerclub@naver.com

發行人: 이현우

編輯長: 임병룡

編輯委員: 윤지영, 노영환, 권혁화, 전찬희, 하지은

제   작: ㈜나셀프 마이온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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